갈 곳은 별로 없지만 오라는 곳은 참 많다.

밤과 낮,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며 순진한 남편을 유혹하는 야릇한 유해 환경 실태를 보고한다.

이 시점에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지뢰밭 같은 유혹을 뚫고 무사히 귀환한 남편에게 따뜻한 포옹 한번 해주는 거다.

 

오랜만에 선배를 만났다. 우리는 지구에 있는 모든 술을 퍼마시며 김훈의 소설에서부터 남극에 사는 북극곰 이야기까지

주제를 넘나들다가 8할이 감긴 눈으로 김현식 노래까지 합창했다.

나이 마흔이 되어서 '서른 즈음에'의 여섯 번째 소절을 읊조릴 무렵,

"아, 오랜만에 선배 노래 듣고 싶다!"

"노래방 갈까?"

 

자정이 넘은 광화문 거리는 흑백사진처럼 소슬했다. 노래방 간판을 찾아 휘청거리던 두 남자는 젊은 청년의 안내를 받았다.

"노래방 가시려고요?"

"네. 아저씨, 태진이에요? 금영이에요?"

 

방방마다 절규하는 사내들의 노랫소리 사이로, 어정쩡한 두 남자는 짧은 원피스를 입은 여인을 따라 들어갔다.

자줏빛 방에는 묵직한 대리석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처음부터 우리를 '오빠'라 부르던 여인은 부담스러운 친근감과 카리스마 비슷한 것을 발산하면서 맥주 여섯 병과

과일 안주를 방에 들여놓았다.

그러고는 걸 그룹 노래를 두 곡이나 열창했다.

선배는 무겁게 생긴 뿔테 안경을 머리 위에 올리고는 탬버린을 찰랑거렸다.

나도 어깨가 빠질 듯 탬버린을 흔들어댔다.

금세 공기가 뜨거워졌다.

선배는 '서른 즈음에'는 예약도 않고, '무조건', '난 알아요' 등을 해병대처럼 복창했다.

 

알코올기가 온몸에 창궐하면서 눈에 들어오는 모든 피사체가 몽실몽실해지고 있었다.

자줏빛 소파에 눌어붙은 내 옆으로 풍만한 여인이 들어와 앉았다.

이내 오른쪽 어깨가 무거워졌고 귓불이 촉촉해지는 걸 느꼈다.

아무도 응하지 않는 반주 소리가 에밀레종처럼 윙윙거리는 가운데, 두 남자에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후의 장면은 상큼한 생활 정보가 차고 넘치는 레몬트리의 편집 방향에 누가 되어 과감히 들어냈다.

단, 두 남자는 노래방에서 아주 그렇고 그런 정도까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고 그런 근처까지만 오가다가 방을 나선 거다.

진짜로 아무 일 없었다.

 

화장실에 들러 계산대 쪽으로 갔더니 실랑이가 붙었다.

선배가 "우리가 (아가씨) 부른 것도 아니고, (술과 안주) 시킨 것도 아닌데"라며 소리를 지르자, 험악한 사내 서너 명이 선배를 둘러쌌다.

나는 중간에 얼른 끼어들면서 얼마인지 물었다.

"28만원만 내요."

"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면서, 입천장까지 벌렁거렸지만, 겁이 더 많이 났다. 빨리 여길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카드를 꺼내들며) 3개월로 해주세요. 근데, 영수증에 뭐라고 찍혀요?"

"아, 치킨집으로 해줄 수도 있어요."

 

그렇게 28만원짜리 통닭집 영수증을 들고 노래방 문을 나섰다.

지갑을 도둑맞은 것처럼 씁쓸하긴 했지만, 통닭집 영수증으로 둔갑시킨 것이 은근한 위안을 주긴 했다.

 

"선배, 서울은 진짜,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니까."

 

그날 선배의 '서른 즈음에'는 전주도 듣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아내로부터 "웬일로 치킨을 28만원어치나 먹었어? 2만8천원을 잘못 찍은 거 아냐?"에서부터,

"왜 그걸 삼성카드로 긁었어, 하나카드로 긁으면 3개월 무이자에 적립도 더 많이 되는데" 하는 잔소리까지 들었다.

'여보, 그런 말 하지 마. 난 억울하고 아까워서 죽을 지경이라고.

'그렇게 헛돈을 날리고 들어올 때면, 마트에서 미니카 사달라고 조르던 아들 녀석이 불쑥 떠오른다.

 28만원이면 크로바 미니카 40대는 사줄 수 있는데.

 

남편의 환경이라는 것이 대략 이렇다. 남편은 선량하게 살고 싶지만, 주변 환경이 온통 지뢰밭이다. 고로 필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남편은 아무 문제가 없단 얘기다.

에헴! 문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곳저곳에 널린 말초신경을 쭈뼛하게 하는 문장과 사진들이다.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면 '구제역 안동서 확산, 초기 대응 실패가 원인'이라는 시사적 표제 사이에서 '여교수와 성관계 동영상 협박 승려,

결국'이라는 제목이 반짝거린다.

읽어보면 별것도 아니다. 그냥 돈 문제다.

 

그 많은 기사들을 놔두고 '김시향 누드 사진 유출 전 소속사 측 고소'라는 타이틀을 네이버 메인 페이지에 올린 『조선일보』에게

낚이고, '소변 줄기와 성기능을 한 번에, 오 놀라워라'라는 민망한 제목을 올린 『헬스조선』에겐 '진정 놀랍다'는 찬사밖에

나오질 않는다.

심지어 SBS까지도 '여학생 치마 속으로 볼펜 쏙'이라는 제목을 네이버 뉴스 캐스트에 올려놓는다.

전 국민이 보는 SBS에서 온 국민이 보는 네이버에 올릴 가장 중요한 한 문장이 진정 '치마 속 볼펜'밖에 없었는지 따져 묻고 싶다.

 

원기왕성하게 출렁이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카타르 아시안컵 기사를 읽고 있으면 오른쪽 구석에서 '섹스 시간 5배 늘려주는 변강쇠 콘돔

인기', '흠뻑 젖어버린 그녀 팬티 속 사정은?', '그녀가 원하는 진짜 하룻밤' 등의 표제가 반갑다며 손짓한다.

비뇨기과나 남자 물건을 파는 이런 광고가 유력 언론사 홈페이지에서 아침부터 번쩍거리는 이유는 뭘까?

심야라면 모를까. 아무 관심도 없는 변강쇠 콘돔에 들어와 있는데, 함께 일하는 여직원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옆에 서 있었다.

 

"엇, 나 아니야, 아니라고. 정말 아니야. 내가 변강쇠 콘돔이 왜 필요하겠어!" 사무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함께 일하는 여직원들에게도

약간의 문제가 있다.

미모도 웬만큼 되거니와 너무 잘 꾸미고 다닌다. 게다가 너무 친절하기까지 하다.

핸드 크림을 바른 단풍잎 같은 손으로 결재판을 펼칠 때면 목 뒤에 있는 나사가 스르르 풀리는 것 같다.

선배는 내가 너무 순박해서 그렇다는데, 그건 잘못된 진단이다.

며칠 전에 노래방에서 아가씨랑 그렇고 그런 일까지 있었는데, 순진하다고?

 

주차장에 가면 차 유리창에 대출과 화끈한 만남 전단지가 촘촘히 꽂혀 있다.

전화 한 통화면 사진 속에 있는 그녀가 달려와 화끈하게 위로해준다는 내용이다.

사진 속 그녀가 진짜 오는지, 아니면 비슷하게 생긴 여인이 오는지, 아니면 완전 딴판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전화를 한 번 했더니,

기이한 문자 메시지가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든다.

중요한 미팅을 하고 있는데 '오빠, 나 젖었어'가 뜨질 않나, 아내와 영화 보고 있는데 '오빠,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가 오기도 한다.

최근에는 아무 이유 없이 '오빠 미워'까지 보내더군.

 

날이 어두워지면 각종 유해 업소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거리마다 '팁 3만원', '미녀 항시 대기' 등을 인쇄한 풍선 기둥에

바람이 들어가고, 곳곳에서 박하사탕이 붙은 야릇한 전단지를 뿌리기도 한다.

길을 걷고 있으면 난생처음 보는 청년이 다가와 "찾으시는 곳 있으세요?"라고 묻기도 한다.

 

대한민국은 이미 순진한 남편이 살아가기엔 너무 위험한 곳이 됐다.

전화 한 통화면 화끈해질 수 있고, 한 발자국만 옮기면 여인들과 어깨동무하고 합창할 수도 있다.

안마만 받을 수 있는 안마집을 더 찾기 힘들고, 노래만 부를 수 있는 노래방도 가려서 들어가야 하는 시대다.

잔잔하게 대화할 수 있는 채팅 사이트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런 환경을 피해 회사와 집을 오가는 것이 학교-집-도서관을 오갔던 고등학교 시절보다 힘든 것 같다.

이 시점에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지뢰밭 같은 유혹을 뚫고 무사히 귀환한 남편에게 기립 박수를 보내주는 거다.

 

며칠 전부터 아가씨 대리운전이라는 곳에서 매일 문자가 왔다.

아가씨를 위한 안전한 대리운전인지, 아니면 아가씨가 대리운전을 하러 오는 건지, 그리고 진짜 대리운전만 하러 오는 건지 궁금했다.

가격도 비싸면서 도착은 왜 이리 늦는지, 대리운전을 부르고 45분이 지나서 묘령의 여인이 걸어왔다(보통 대리운전 아저씨들은 뛰어온다).

그녀는 묵묵히 운전을 하다가 엉뚱한 길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남자만 알고 있는 남편 이야기를 전하는 '남편 생태 보고서'

두 번째 이야기는 이 장면에서 찜찜하게 마무리한다.

원래 명품 드라마는 이런 식으로 끝나는 거다.

 

레몬트리 2011 02월호

'일상 > 世事雜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내 화분 효과  (0) 2011.05.16
늙으면 주책..  (0) 2011.04.22
태생적 환경  (0) 2011.03.08
목소리로 판단하는 특성<펌>  (0) 2011.03.08
회식때 피하고 싶은 자리  (0) 2011.03.03

+ Recent posts